30 June 2018
어린시절 나는 특히 그리스 신화들을 좋아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숲, 그리고 강물등… 대자연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신들의 이야기는 꿈과 상상의 날개를 달아 다른세계로 데려가곤 하던 내 어린 영혼의 쉼터와도 같았다. 하늘을 떠다니는 힌구름은 마치 제우스신의 휘날리는 수염과도 같았다. 뜨겁게 타고 있는 태양속에는 마차를 끌고 달려가는 아폴로신이 보이는 듯 했다. 드넓은 바다를 힘차게 가르며 올라오는 포세이돈, 숲속 님프들을 울린죄로 강물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슬픈사랑에 빠져야 했던 나르시스…그런 신들을 애모하고 동경하던 어린마음은 이후 자라면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아닌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나도 만날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그리움과 설레임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속에 숨겨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은 어떤 힘에 대한 어린시절 희미한 동경은 성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걷게된 정신세계 영성적 삶의 여행의 계기가 되었다.
가슴속에 존재하던 막연한 그리움, 언제가 꼭 만나고 싶은 이를 기다리는 설레임은 나를 이방인처럼 현실에서 늘 겉돌게 만들었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간에도 나는 언제나 까닭모를 고뇌와 아픔을 홀로 지고 다녔다. 왜 슬프고 아픈건지도 모르면서 공공연한 소외된 슬픔과 아픔으로 나는 삶과 사물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한발치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삶의 가장자리에 서서, 한 발은 세상안에 딛고, 한 발은 세상밖에 딛은채 나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삶을 내 맡기고 있었다. 전우주를 관장하고, 오묘한 자연의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어떤 거대한 힘이 분명히 있었다. 그 힘을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찾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이름이나 형상들로도 쉽게 한정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그 힘의 실체가 훨씬 더 거대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보다는 철학에 더 끌림을 느꼈다. 선천적으로 회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던 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보다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이성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철학이 적성에 더 잘 맞았다.
그러던 어느날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티 책들을 통해 힌두이즘을 만나게 되었다.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그들은 신의 실체를 표현하고 있었다. 신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절대적인 힘인과 동시에 사실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분명한 경험적 경이로움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설명하고 있는 신의 실체는 그동안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힘의 실체와 일치했다. 어떤 이름이나 형상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는, 오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내면적 경험의 실체. 그 실체가 신이라고 말하는 그들로부터 나는 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힌두이즘이라는 종교로서 보다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이성과 직관,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풀어나가는 인도신비철학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직접적인 경험을 시켜줄 스승이 없으니 한계에 부닥쳐 고민하게 되었다. 힌두이즘에 대해 번역되어 있는 책들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로 가기위해 내심 계획을 세우고 있던 터에 초월명상을 배우게 되었다. 초월명상은 인도에서 유래된 명상기법인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마하리쉬에 의해 창조되어 이미 전세계적으로도 수많은 수행자와 명상센터, 명상대학들을 가지고 있던 유명한 국제명상기법이었다. 비틀즈나, 닥터 쵸프라(Dr. Chopra), 존그레이(John Gray), 라비상캬르 (Ravi Shankar) 등이 모두 성마하리쉬의 유명한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초월명상의 그러한 유명세를 알리가 없던 나는, 그저 인도명상법이라는 사실에만 끌려 배우기로 마음을 정했을 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이십분간씩 하는 간단한 명상법이었는데, 애초에 별다른 기대나 경험을 바랐던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마치 어린시절 내가 즐겨찾던 영혼의 쉼터로 되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눈을 감으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수 있어서 좋았다. 뭔가 오래전부터 아주 익숙한 듯한 느낌. 편안하고도 자유로와지는 듯한 느낌. 서서히 내면에서 알지못할 기쁨이나 자신감도 생겨났다.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은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갈망하고 있던 신에 대한 막연한 믿음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버스나 전철안에서건, 도서관이나 집 다락방에서건,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일 수 있는 곳이면 눈을 감고 앉아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영성적 삶은 나를 내외부적으로 빠르게 변화시켜가기 시작했다. 명상을 시작한지 몇개월도 지나지 않아 계획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변화들이 연달아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부적으로는 나를 홍콩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국제결혼, 출산, 말레이시아 이민등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면적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신의 세계에 가까이 가게 만들었다. 수행경험이 쌓임에 따라 나의 관심도 힌두신비철학에서 인도점성학(Jyotish), 요가 (Yoga), 그리고 중국젠(Zen) 순으로 점차적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일어난 내부의 변화들은 몸과 정신, 그리고 영혼에 길고 긴 정화과정을 통하여 내 삶을 다시금 태어나게 했다.
흰구름처럼 긴 수염을 휘날리는 신을 만나고 싶어 나섰던 삶의 여행에서, 나는 태양과 달, 별들의 모습을 한 신; 토.수.화.기.공 등의 에너지속에 감춰져 있는 신;그리고 그 안에 절묘하게 함께 엮여져 있는 나와 그리고 다른 우리네 삶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죠티쉬 이야기는 내가 여행길에서 만난 신과 별들, 그리고 삶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여전히 여행길을 걷고 있다.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처럼 신과 별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삶들이 내가 걷고 있는 여행길을 계속해서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더 이상 혼자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